아침에 짐을 싸고 방 청소를 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청소를 끝내니 12시 반이 됐다. 떠나려고 하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삿포로에 참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신가와역에 도착해 야마다 상한테 전화를 걸었다. 방 청소하면서 생긴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연락을 하고 삿포로역에 도착해 에스타 건물 1층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 오비히로 행 버스 티켓을 끊고 1시간 반 정도 기다렸다. 떠나는 게 참으로 실감나지 않았다. 이제 어떤 일이 펼쳐질까 내심 기대도 있었다.

시간이 되자 버스에 탑승했다. 운 좋게 티켓에 적혀진 좌석 번호가 창가자리였다. 창밖을 보면서 버스는 삿포로 시내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밝고 있었다. 버스 천장 위 TV에서 영화를 하고 있었다. 좌석 팔걸이 옆에 이어폰 홈에 이어폰을 끼우고 영화를 봤다. 영화 제목을 모르지만 장르는 학원 로맨스였다. 학교에서 남자가 여자를 짝사랑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어설픈 일본어로 이해한 내용으로는 이렇다.

남자 A는 여자 B가 전학오자 호감이 생겨 친구가 되자고 얘기한다. 같이 학교 생활을 하면서 A B를 짝사랑하게 된다. 여자는 남자의 표현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인지를 모른 채 남자에게 친구로서 고마워한다. 후에 여자는 다른 남자 C와 사귀게 된다. A는 그 사실을 알고 B와 어색하게 지내고 일부러 거리를 둔다. B는 이해가 안 된 채로 학교 생활을 했다.

졸업식 날이 왔다. A B에게 롤링페이퍼와 같이 졸업수첩에다 서로 인사말을 적자고 말한다. 그렇게 서로 수첩에다 적어주고 나서 헤어지게 된다. 이날 도서관에 대출도서가 있어서 B는 도서관에 들리고 거기서 후배가 보여준 책 대출기록에 남자 A가 빌려간 기록이 남은 것을 확인했다. 책 아래 귀퉁이에 A가 그녀와의 추억을 캐릭터로 그렸다. 페이지를 젖혀서 한번에 후루룩 넘기자 짧은 애니메이션이 그려졌다. 이때 그녀는 그를 다시 보고 싶어하고 남자친구 C에게 A를 잠깐 찾아야겠다고 말했다. C는 허락해줬고 B A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고 믿고 학교에서 그가 있을 곳만한 곳을 찾고 옥상에서 멍하니 있는 A를 바라본다. A B를 보자 깜짝 놀라고 B A에게 친구가 되자고 악수를 청하고 A는 기쁜 얼굴로 B와 악수한 채로 영화는 끝난다.

결국 A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하고 친구 관계까지로 마무리가 된다. 훈훈한 마무리였지만 이것은 A에게 어찌 보면 비극이었다. 사실 A가 친구가 되자고 말한 것은 나 좋아해. 너한테 관심있어라는 말과 다름 없다. 간접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B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의 사랑이 이뤄지는 데 실패한 것은 A B 둘의 잘못이고 결국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 둘을 보면서 어떤 이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발을 들이기가 힘든 영역으로도 비춰진다. 서로의 마음에 핀트와 타이밍이 잘 맞아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설사 마음이 잘 맞았다 해도 상황이 또 여의치 못하면 그것도 또 그거로써 무용지물이다. 이 영화제목을 모르는 게 나에게 아쉬울 뿐이다.

사랑에 대한 단상을 끝내고 오비히로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들었던 느낌은 생각보다 꽤 조용하고 경북 안동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자 밖으로 나갔다. 오비히로는 부타동이 유명하다고 하길래 판초에서 부타동을 먹고 나서도 허기가 살짝 져서 라멘을 또 먹으러 갔다. 간단히 술을 마시고 숙소에서 5층 라운지에서 송별회할 때 선물로 받은 이모죠주도 마셨다. 전에 마셔서 반쯤 남았는데 술이 쌔서 그런지 살짝 취했다.

병을 다 비웠는데도 뭔가 아쉬워 밖으로 나와 기타노야타이 포장마차 거리로 가서 하이볼에 꼬치를 시키고 또 마셨다. 숙소에 올 때쯤 완전히 취해서 몸 가누기도 힘들었다. 겨우 씻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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